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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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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스웨덴 출신 그룹 ABBA는 물론 세계적인 그룹이지만 우리 나라에선 특히 세계적인 지명도 이상의 사랑을 받았던 그룹입니다. 자극적이지 않은 멜로디와 친근감 있는 노래가사, 완벽한 화음 등이 우리에게 그토록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요소이었죠.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들의 특이한 그룹이름은 멤버들 이름 첫글자를 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ABBA는 비록 70년대에 처음 그룹으로 형성되었지만 각 멤버들은 모두 그룹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솔로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니는 60년대의 팝 밴드인 The Hep stars에 있었으며 비요른은 Hootenanny singers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이 만난 것은 1966년이었고 이때부터 이 둘은 콤비를 이루어 듀오로 활동을 했습니다. 노르웨이태생으로 스웨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프리다는 1967년 스톡홀름으로 가서 가수생활을 시작했으며 아그네사는 17세부터 레코딩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몇 곡을 히트시켰습니다. 1970년 베니와 프리다는 동거를 시작하였고 비요른은 1971년에 아그네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1972년 베니와 비요른은 "People need love"란 곡을 레코딩을 할 때 안나와 프리다에게 백 보컬을 맡겼는데 이 곡이 히트를 하자 1973년 이들 두쌍은 ABBA라는 그룹이름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이들은 "Ring Ring"이란 곡으로 유로비죤 송 페스티발에 도전했으나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습니다. 다음 해인 1974년에 다시"Waterloo"란곡으로 유로비죤 송 페스티발에 도전 그랑프리를 차지하여 그들의 이름은 비로소 세계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1974년의 유로비죤 송 페스티벌에는 올리비아 뉴튼 존 ,질리오라 징케티등 많은 스타들이 대거 참여했던 행사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율동과 리듬, 완벽한 화음을 구사한 ABBA에게 우승의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유로비죤 송 페스티벌의 우승 곡인 "Waterloo"는 32개국 5억의 시청자 덕분에 유럽에서 폭발적인 판매고를 기록하였으며 그후 어틀랜틱레코드사에서 영어로 발매하여 빌보드 싱글차트 6위 앨범차트 145위를 기록하였고 전세계적인 히트를 했습니다.

이후 같은 해 "Honey, Honey"를 발표하였고 75년 2집 ABBA를 발표하여 SOS가 유럽차트 정상을 차지하였고 "Mamamia""Fernando"등이 수록된 세 번째 앨범 Greatest hits가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1977년에는 미국싱글차트 1위를 차지한"Dancing Queen"이 담긴 네 번째 앨범 "Arrival"을 발표했고 78년 5집 "The Album"에서 "Take a chance on me"를 3위에 79년 6집 Voulez-Vous까지 연이은 골드 앨범을 기록하는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1979년 1월9일 유엔본부에서 주최했던 "세계 불우아동을 위한 기금마련 자선콘서트"에서 'Chiquitita를 불러 찬사를 받은 후 비요른과 안나가 이혼성명을 발표했고 뒤를 이어 1981년에 베니와 프리다마저 이혼을 발표해 그들을 좋아하는 많은 팬들을 실망시켰다. 남남이 되버린 이들 2쌍은 노래만은 함께 무대에서 부르기로 했다.

1980년에 발표한 앨범 "Super trouper"는 타이틀곡과 "The winner takes it all"이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1981년에 발표한 앨범 "The Visitors"역시 히트를 했다. 1982년 말에 애니 프리드가 "Something's going on"을 발표하여 'I know there's something going on'을 히트시켰고 아그네사도 83년도에 "Wrap your arms around me"를 내놓아 'Can't shake loose'를 히트시켰다. 85년에는 영어판 2집 "Eyes of a woman"을 발표했고 86년에는 피터 세트라 (Chicago의 멤버)의 프로듀서로 레코딩을 시작하여 88년 3집 "I stand alone"이란 타이틀로 공개했다 시대의 흐름으로 인해 아바의 전성기는 다시 재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꾸준히 아바를 사랑하는 팬들과 새롭게 아바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팬들을 위해 소속사인 폴리그램에서는 1993년에 베스트 앨범형식인 "Gold album"과 "More ABBA gold"를 발표하였다.

주 : 실제로 아바 해체후 발표한 아그네사의 앨범은 아바 결성전 발표했던 솔로 앨범 6장을 합치면 실질적으로 7, 8, 9 집이 되는셈임.

2.Part1-불멸의 스토리 1

1970년대,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는 운명(하지만, 재능과 치열하고도 고된 작업의 결과로)처럼 나타난 스웨덴의 한 그룹이었다. ABBA, 2쌍의 커플로 이루어진 이 그룹은 70년대의 가장 성공적인 활약상이었으며, 심지어 20세기를 통틀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전세계가 아는 사실은 ABBA의 신화가 1974년 4월 그들이 Waterloo로 유러비젼 송 컨테스트에서 우승한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당시 ABBA는 2년간 그 이름으로 활동해 왔었고 맴버 개개인들은 스웨덴 음악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베테랑들 이었다.

ABBA의 역사는 비요른과 베니가 처음만난 1966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요른 울바에스(Bjorn Kristian Ulvaeus)는 포크밴드인 '후트내니 싱어즈(the Hootenanny Singers)'의 맴버였으며, 반면 베니 안데르손(Goran Bror Benny Andersson)은 당시 스웨덴의 최고 인기그룹 '헵 스타즈(Hep stars)'의 키보드 주자였다.

1966년 여름, 두 그룹이 처음 대면했을 당시 그들은 스웨덴의 인기있는 음악 축제인 Folkpark Tour에 참가중 이었다. 당시, 군입대 예정이었던 후트내니 싱어즈는 송별회 파티에 헵 스타즈를 초대했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비요른과 베니는 그들 사이에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난후 다른 파티 석상에서 만난 비요른과 베니는 서로 함께 음악작업을 할 것을 약속했다.

비요른 부친의 도움으로, 한밤중 비요른 부친 사무실에 그들의 악기와 앰프를 옮긴 비요른과 베니는 곧 작업에 들어가서, 나중에 Hep stars에 의해 녹음이 되는 Isn't It Easy To Say를 완성하게 된다. 훗날 ABBA라는 거목으로 자라나게 될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1969년에 들어서, 두 그룹의 인기는 점차 쇠퇴 하기 시작했고, 각각의 여름 순회공연 이후, 후트내니 싱어즈는 비정기 라이브 공연과 함께 의무적인 음반작업을 이어 나갔지만, 반면 베니는 헵 스타즈의 맴버 전원과 함께 그룹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비요른과 베니는 후에 아바의 매니저가 되는 스틱 안데르손(Stig Anderson)의 후원으로 곡 제작과 음반작업을 계속해 나간다. 스틱은 베니와 비요른의 작곡과 음반제작 능력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곧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리라고 보장을 했다.

비요른과 베니의 두번째 싱글은 Hej Gamle Man(Hey Old Man)이었으며, 이곡은 비요른과 베니의 약혼녀들인 아그니타(Agnetha Ase Faltskog)와 프리다(Anni-Frid Synni Lyngstad)가 백보컬을 담당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훗날 미래의 ABBA 맴버가 되는 4명이 같은 음반에 등장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67년 가을 이래로 음반을 내놓으며 활동을 해온 프리다는 1969년 3월 스웨덴의 남부지방인 Malmo에 있는 한 캬바레 무대에 출연중에 베니와 처음 만났다-당시 헵 스타즈는 Malomo에 있는 다른 무대에 출연하고 있었다. 아그니타는 1968년초 성공적인 데뷔이후 줄곧 솔로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969년 5월 그녀는 비요른과 우연히 같은 TV쇼에 출연하게 된 이후,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70년 11월, 그들 4명은 공식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Festfolk 축제의 캬바레가 바로 그곳이었다. 이 첫번째 시도는 결과적으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룹을 결성하고자 하던 모든 계획이 일단 보류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은 서로의 음반에 계속 모습을 나타 내었고, 다른 모임에서도 같이 공동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1971년 7월 비요른과 아그니타가 결혼을 하게 되고, 그해 가을, 비요른과 베니는 스틱의 회사인 폴라뮤직에서 하우스 프로듀서로 일을 시작한게 된다.

1972년 봄, 다시 그룹결성을 추진하려는 노력이 결정되고, 진정한 첫번재 아바의 싱글인 People need love가 녹음 되었다. "Bjorn & Benny, Agnetha & Anni-Frid"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발매된 첫싱글은, 스웨덴 차트에서 20위권에 들어가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72년 가을, People need love의 성공이후, 그룹으로서의 그들의 장기적 미래가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두커플은 앨범제작에 돌입한다.

1973년 2월, 유러비젼 송 콘테스트 출전곡으로 비요른, 베니, 스틱이 공동제작한 Ring Ring을 선택한다. 스웨덴 예선당시, 아그니타는 비요른과의 첫번째 아이인, 딸 린다의 출산이 임박해 있던 상태였지만 본선진출을 위해서 맹연습을 거듭했다.

당시 그룹은 겨우 3년째 해를 마친 상태였지만, 스웨덴 국내예선에서 Ring Ring의 스웨덴, 영어버젼 두곡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그리고 그들의 곡은 스웨덴 싱글, 앨범 차트에서 3개의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지만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선진출에 좌절하고 만다. 스웨덴 국내예선 심사 위원들이 다른 곡의 손을 들어 준 것이었다.

이때 그들 그룹의 이름이었던 Bjorn & Benny, Agnetha & Frida는 모든이들이 너무 길고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매니저 스틱은 그들 이름의 첫글자를 따 ABBA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한 신문사에서 개최한 Bjorn & Benny, Agnetha & Frida 의 새명칭 공모에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명칭에 대한 새 결정은 확정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스웨덴에 이미 "ABBA"라는 이름의 생선 통조림 가공회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스틱이 그 회사에 인기 팝그룹에게 이름을 빌려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을때, 다행히도 그회사는 반대하지 않았다.(물론 회사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1973년 여름동안, ABBA는 스웨덴 Folkpark에 참가했다. 그러나 순회공연 참가는 가을까지 계속되지 못했다. 다음 앨범의 제작에 착수했을때 'ABBA'는 그들의 정식이름으로 확정되었다. 1년후 , 비요른, 베니, 스틱은 유러비젼 송 콘테스트의 우승을 위해서 새로운 곡의 제작에 들어간다. 그 결과로 나온 Waterloo는 1974년 2월 간단히 스웨덴 예선을 통과하게 되었고 마침내 1974년 4월 6일, 영국 남부 휴양지 Brighton에서 개최된 본선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된다.

Waterloo는 ABBA의 진정한 첫번째 국제적인 히트곡이 된다. 영국, 서독, 노르웨이, 벨기에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다른 여러나라에서는 Top5안에 들게 되었다. 심지어 팝의 본고장 미국도 Waterloo의 무서운 인기 열풍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Waterloo는 빌보드챠트 6위까지 오르게 된다.

이후 18개월간 일부 유럽국가에서의 인기를 제외하고는 Waterloo 이외의 싱글들이 영국챠트에서 고전을 면치못했다. 드디어 언론에서는 아바는 반짝스타라는 평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974년 가을과 겨울, 그리고 1975년 초 ABBA는 유럽순회 공연과 3번째 앨범 녹음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간단히 'ABBA'라고 명명된 3번째 앨범은 1975년 봄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3번째 수록곡 SOS는 마침내 영국챠트에선 커다란 히트를 기록하게 되엇고, 이것은 이후 연속되는 18개의 Top10히트곡들중 첫번째 것이 되었다.


Part2-불멸의 스토리 2

SOS 다음으로 등장한 Mamma Mia는 Waterloo이후 첫번째 영국챠트 1위곡이 된다. Mamma Mia와 함께 발표된 I do,I do,I do,I do,I do로 1975년 여름 호주에서 ABBA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ABBA는 다른 여러나라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중에서도 호주는 가장 열렬히 아바를 사랑한 국가였다.

1976년 3월 ABBA의 대표적인 곡중의 하나인 싱글 Fernando가 발매되었다. 같은달 ABBA는 그해 가을에 발매되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될 앨범 Arrival의 녹음작업에 들어간다. Arrival 앨범은 1976년 8월에 발매된 싱글 Dancing Queen의 인기에 힘입어 발매전 예약이 600만장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Dancing Queen은 원래 스웨덴 국왕의 결혼 축하곡으로 제작 되었으며 Fernando와 같은때인 발매 1년전 1975년에 녹음되었다. 아바의 싱글중 최고판매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ABBA의 유일한 빌보드챠트 1위곡 이기도 하다.

Arrival 앨범에서 인기를 얻은 두번째 싱글은 Money,Money,Money였고, 이곡이 인기챠트를 휩쓸고 있을때, ABBA는 1977년 2월에 시작될 유럽및 호주순회공연 준비로 바쁜 상태였다. 특히, 런던의 Royal Albert Hall에서 열린 2차례의 콘서트에서는 단 1만장의 표를 구하기 위해 350만명이나 신청을 해, 영국언론은 아바매니어가 비틀매니어를 잠재울만 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1977년 투어는 어느곳이든지 만원사례를 기록한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러는동안, 새로운 ABBA의 싱글곡 Knowing Me Knowing You가 영국챠트에서 5주연속 1위를 차지하게 된다.

1977년 3월, 순회공연의 무대가 호주로 옮겨졌을때 장편영화인 ABBA-The Movie의 작업이 시작된다. 이영화는 이듬해인 1978년 전세계에 개봉되어 Star Wars같은 영화들과 경쟁하여 흥행순위 7위를 달성하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국내에서도 개봉되었는데, 그때 라디오 Pop프로그램 DJ들이 영화에서 '애바'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다들 한동안 '애바'라고 부르기도 했고, 영화에 나오는 아그니타와 프리다의 힙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순회공연후 스톡홀름으로 돌아온 비요른과 베니는 새로운 곡의 제작에 들어간다. 1977년 5월 ABBA-The Album의 녹음작업이 시작된다. ABBA-The Album은 1977년 12월에 처음 발매된다.(이것은 북유럽 국가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머지 국가들에서는 1978년 초에 발매가 시작된다.) 이 앨범에서 The Name Of The Game이 먼저 인기를 얻기 시작하는데, 스웨덴에서 앨범이 발매될 무렵 아그니타는 비요른과의 두번째 아이인 아들 Christian을 얻게 된다.

ABBA-The Album의 두번째 인기챠트 진입곡은 Take A Chance On Me 였는데 이곡은 빌보드챠트 3위까지 오르게 된다. 1978년 봄, ABBA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ABBA의 매력에 대해 약간의 저항감을 가지고 있던 미국에서 대규모 홍보활동을 가지게 된다. 이 결과로 ABBA-The Album은 앨범챠트 상위(14위)를 차지하게 된다.

ABBA는 홍보활동을 마치고 재빨리 스튜디오로 돌아와 새 앨범에 들어갈 곡들의 녹음작업을 시작한다. 그 작업의 첫번째 결과로 1978년 9월에 Summer Night City가 싱글로 발매된다. 결과적으로 이곡은 다른 앨범에 수록되지는 못하지만, ABBA의 고국 스웨덴에서 마지막 1위곡이 된다. Summer Night City가 정상을 차지한 1978년 10월 6일 베니와 프리다는 약혼 9년만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다.

1979년 1월, ABBA는 또 한곡의 싱글인 Chiquitita를 내놓는데 이곡은 뉴욕에서 있었던 유니세프 자선기금 마련 All Star Concert에서 처음으로 연주된다. Chiquitita는 1979년 ABBA의 가장 큰 히트곡이 된다. Chiquitita의 싱글발매 소식과 함께 무척이나 슬픈 소식하나가 알려지게 된다. 그것은 비요른과 아그니타가 최종적으로 이혼에 합의했다는 뉴스였다. 비요른과 아그니타의 이혼이 ABBA의 끝을 의미한다는 무성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맴버들은 그들의 파경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공동으로 작업해 나갈 것을 동의 했다. 새로운 앨범 제작은 봄까지 계속되어 마침내 1979년 4월 Voulez-Vouz 앨범이 발매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싱글 Does Your Mother Know는 비요른의 마지막 리드보컬 곡이 되었다.



1979년 가을, ABBA는 북미대륙과 유럽순회 공연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새로운 싱글 Gimme Gimme Gimme를 발매했다. 순회공연은 11월 아일랜드에서 끝났으며 곧이어 명곡 I Have A Dream이 싱글로 발매된다.

ABBA는 새해가 되면서 새로운 앨범제작을 계획했었는데, 1980년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75년 이래 처음으로 레코딩 작업에서 벗어나서 휴식을 취했는데, 그사이에 3월에는 그들의 마지막 순회공연이 된 일본공연을 3주동안 펼쳤다. 그해 7월 새로운 싱글인 The Winner Takes It All이 발매되고,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차트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그 다음에 발매된 싱글은 1980년 11월에 발매된 앨범 Super Trouper의 타이틀 곡인 Super Trouper 였는데, 이곡은 9개의 영국차트 1위곡들중 마지막 곡이었다. 이런 대기록을 가졌던 아티스트는 그때까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클리프 리챠드 밖에 없었다.

1981년 2월 더욱 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베니와 프리다가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아그니타와 비요른이 한것처럼 베니와 프리다 역시 그들의 이혼이 ABBA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룹은 곧 그들의 마지막에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1981년 12월, 싱글 One Of Us와 앨범 The Visitors가 동시에 발매된다. 싱글과 앨범 양쪽모두 발매즉시 전유럽에서 챠트 상위에 랭크된다.

1982년은 그들이 그룹으로써 함께한 마지막 해였다. 새로운 앨범제작을 계획했었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싱글 두곡과 함께 그간의 히트곡을 편집한 더블앨범 The Singles-The First Ten Years를 내놓았다. 앨범은 곧 여러개의 챠트에서 정상을 차지하지만 두개의 싱글곡중 첫번째 곡인 The Day Before You Came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영국에서는 겨우 32위에 그쳤지만 스웨덴,노르웨이,네덜란드에서는 Top 5에 들었고, 벨기에에서는 챠트 정상을 차지했다.

최후의 아바 싱글곡은 1982년 12월에 발매된 Under Attack인데, 이곡은 작지만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 ABBA의 멤버들은 ABBA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며 각자의 새로운 목표에 대한 도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다시는 함께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몇년후 팝뮤직 팬들의 관심이 새로운 그룹이나 새로운 사운드로 돌려졌을때, 스웨덴 출신 4인조 혼성그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199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히트곡을 편집한 앨범인 ABBA Gold가 1992년에 발매되자마자 전세계적으로 챠트정상을 차지하면서, ABBA가 발표했던 앨범들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이 재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ABBA의 재결성은 미지수이다. 그리고 ABBA의 멤버들은 재결성에 대해 여전히 부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음악은 아직도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음악적 유산인 것이다.

3.팝 음악은 범상하지만 매력적이다. 물론 순간적으로 매력적인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20년 동안 700만장의 앨범을 판매하기는 힘들다. 누구? 안니 프리드 링스타드(Anni-Frid Lyngstad), 베니 안데르슨(Benny Andersson), 브외른 울바에우스(Bjorn Ulvaeus), 아그네타 팔초그(Agnetha Faltsog)라는 발음하기 힘든 멤버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73년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에 참여하여 3위에 입상한 그룹의 이름이 '브외른, 베니, 아그네타 앤 프리다'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새겨진 것은 이듬해 이름의 첫 글자만을 따서 ABBA라는 간명한 이름으로 컨테스트에 재도전하여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부터다. 이 직후 이들은 '제 2의 국어'로 노래부른 이들로서는 최초의 국제적 수퍼스타가 되었고, 1982년 [Super Trooper] 공식적으로 해산할 때까지 이들의 음악은 세계 전역에서 울려퍼졌다. 더불어 이들은 '대중음악 아티스트 사전'류의 책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아마도) 영원한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은색 플랫폼 구두와 삐까번쩍한 의상을 걸친 빨강머리(안니)와 금발(아그네타)의 여자 두 명이 떠오른다. 아그네타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와 풍부하고 관능적인 안니의 목소리의 결합은 '팝 보컬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저음의 버스(verse)와 다이나믹한 후렴(refrain)은 노래는 팝송의 공식이고, 공식을 지키면서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요령을 체득한 듯이 보인다.

두 여자가 아바의 얼굴이었다면, 점잖은 양복을 차려입은 두 명의 남자들은 아바의 음악적 실세였다. 각각 아그네타와 안니의 연인-남편-전남편이 브외른(기타)과 베니(키보드)는 오랫동안 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를 만드는 것처럼 현명한 작곡 및 편곡 감각을 보여주었다. '완벽한 팝(perfect pop)', '궁극적 팝(ultimate pop)'이라는 표현은 단지 세일즈 용어가 아니라 '인공물(artifact)로서의 팝'이라는 대중음악 본연의 미학을 가장 완벽히 구현했다는 의미다. 멀티트랙을 사용하여 프로듀싱을 많이 거친 두터운 층의 사운드는 '라이브'로 재현하기는 힘들어도 인공적 음이 자연의 소리보다 듣기좋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피아노와 현악기부터 전기 기타와 오르간을 거쳐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악기음들은 이들의 손에 의해 몰개성하면서도 듣기 좋은 사운드로 합성되었다.

하나 더 있다. 아직 MTV가 없던 시절에 싱글 발매와 더불어 '프로모셔널 필름'을 제작한 일도 이들이 '인공물'임을 입증하는 또하나의 사례다. 세계순회공연(world tour)이라는 '소모전'을 피하는 전략은 1977년의 영화 [Abba : The Movie]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쨌든 지나간 이야기 아닌가? 그렇지만은 않다. 1992년 발매된 [Abba Gold]는 이들의 숱한 '그레이티스트 히츠' 앨범들 중의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아바 이후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웨덴 출신 그룹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는 물론이고, 80년대 영국 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레이저(Erasure)는 [Abba-esque]라는 트리뷰트 EP를 발표하여 차트 정상을 정복했고, 미국의 댄스 그룹 인포메이션 소사이어티는 노래를 리메이크하여 댄스플로어 히트곡으로 만들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브외른 어게인(Bjorn Again)이라는 아바 전문 커버밴드도 만만찮은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에는 박스 세트 [Thank You For The Music>]의 발매와 더불어 제인 캠피온의 영화 <뮤리엘의 결혼>이 만들어져 '아바 컬트'는 보다 대중화되었다. "내가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나의 삶은 아바의 노래였지. 나의 인생은 '댄싱 퀸'이야"라는 '못생긴' 뮤리엘의 독백은 음악이 줄 수 있는 환희가 어디까지인지를 웅변해 주었다.

물론 그전부터 아바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와 러쉬(Lush) 같은 '모던록 밴드'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었고, 아일랜드의 슈퍼밴드 U2는 1993년 공연에서 <댄싱 퀸>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고, 스웨덴 공연에서 아바의 두 남자와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구의 게이 공동체에서 아바는 오래 전부터 컬트의 대상이었다. '우리집 엄마 아빠'같은 아줌마, 아저씨들같은 사람들이 '퀴어(queer)'한 사람들의 숭배 대상이라니. 팝 음악은 이처럼 범상하고도 신비로운 수수께끼다. 공포없는 세상, 꿈의 실현, 행복한 경이로움. You Are The Dancing Queen! 그러나 동시에 "Knowing Me, Knowing You There is Nothing We Can Do"같은 '달콤한 절규'의 처절함은? 팝은 정말 일상의 처절한 고통을 잊게 하는 현대의 종교이고 심하게 말하면 민중의 아편이다.

만약 당신이 음악 공부를 하고 싶다면 아바를 연구해 봐라.
모든 음악의 기교와 테크닉, 등 음악의 모든 것들이 아바의 음악에 담겨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모든 그룹 중에서, 아니 팝역사상 아바를 뛰어넘을 그룹이 나오긴 힘들 것이다.

4.틴에이저에서 할머니까지... 스웨덴의 침공

1971년 비욘(Bjorn Ulvaeus)과 결혼한 아그네사(Agnetha Foltskog)의 첫 아이 출산 예정일은 하필 1973년 2월 23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출전 티켓을 따기 위한 스웨덴 본선 당일이었다. 팀 동료 베니(Benny Anderson)의 약혼녀 안니 프리드(Anni-Frid)가 부랴부랴 그녀의 노래 파트까지 연습해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출산이 늦어져 무사히 아그네사는 무대에 올라 '링링(Ring ring)'을 부를 수 있었다. 이 네 사람의 그룹 아바()는 이날 3위에 그쳐 스웨덴 대표가 되지 못하는 고배를 마시지만 온전히 출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일이 잘 풀려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였다. 그 같은 길조는 당장 이듬해에 현실로 나타났다. 마침내 '워터루(Waterloo)'라는 노래로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 32개국 5억 TV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20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 그랑프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워터루'는 순식간에 영국 및 유럽에서 밀리언 셀링 싱글이 되었다.

이후 아바는 마치 천운을 타고난 그룹인 듯 쾌속 항진을 거듭했다. 영국 출신이 아니면 설령 유로비전 대회에서 우승했다 하더라도 곧 잊혀지고 마는 관례마저 운 좋게 비껴 가는 '위대한 예외'를 창조했다. 발표하는 싱글마다 차트 상위권으로 치솟아 영국 차트에서는 18주 연속 톱 10싱글을 기록했고 그중 9곡이 1위에 등극하는 눈부신 히트 퍼레이드를 펼쳤다. 이 '9곡의 넘버원' 기록은 역사상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셋만이 장식한 대 기록이었으며 이로써 아바는 '1970년대에 가장 레코드를 많이 판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안게 됐다.

1978년까지 4년간 아바의 레코드 판매량은 세계적으로 무려 5천3백만 장에 달했다. 1977년 연간 소득이 110억원을 기록, 스웨덴의 자랑인 볼보 자동차 회사의 총판매고 90억원을 제치고 1위 기업으로 부상할 정도였다.

그들의 인기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을 넘어 지구촌을 덮었다. 터키, 이스라엘에서도 음반 판매량 1위였고, 호주 사람 4명 가운데 하나가 1976년 앨범인 <아바 히트곡집><Abba Greatest Hits>를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 소련의 암시장에서도 그들의 LP가 130달러의 고가(당시 LP 한 장 가격은 8달러)로 거래되었다. 극동 지역에서도 그 인기는 막강해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 앨범에서 보통 4곡 이상이 방송과 다운타운가를 뒤덮었다. 1978년 <앨범(The Album)>의 미국 히트 싱글은 '게임의 이름(The name of the game)' '내게 승산을 걸어보라(Take a chance on me)' 두 곡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독수리(Eagle)' '무브 온(Move on)' '음악을 감사해요(Thank you for the music)'도 덩달아 팝송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바는 그러나 결코 운으로 먹고 산 팀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중들의 환호를 독점할 만한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아바의 모든 곡들은 출중한 작곡 실력을 보유한 남성 멤버 비욘과 베니가 당시 매니저이자 폴라(Polar)레코드사 사장인 스틱 앤더슨(Stig Anderson)과 함께 썼다. 그들의 음악이 이윤의 지상 명령에 따라 팝 시장을 요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음악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체 생산'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 했다.

베니와 비욘이 제조해 낸 아바의 경쾌한 '버블 검(Bubble gum) 음악'은 당시로 볼 때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했다. 신시사이저와 '스트링'의 풍요로운 사운드와 종소리 같은 여성 보컬은 유서 깊은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사운드의 벽'(Wall Of Sound) 방식을 따른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명랑한 리듬의 사운드 구조에 더구나 쉬운 멜로디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킬 줄 아는 비범한 능력을 뽐냈다. 그리하여 누구나 듣기에도 좋고 춤추기에도 안성맞춤인 곡들을 뽑아내 1970년대 초중반에 세력을 떨친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끄럽고 복잡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단순한 음악을 바라는 수요층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1978년 <뉴스 위크>지는 “아바의 부패되지 않은(antiseptic) '이지 리스닝' 사운드는 틴에이저에서부터 할머니까지 포괄하는 전 수요층에 어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물론 그들도 비판으로부터 완전 해방되지는 못했다. 팻 분(Pat Boone)의 '모래 위에 쓴 사랑의 편지(Love letters in the sand)'에 기초해 '아이 두, 아이 두, 아이 두, 아이 두(I do, I do, I do, I do)'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 영미의 고전적인 팝 스타일에 편승, 기술 제휴함으로써 그들의 구미에 맞추고 있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이와 함께 음악 외적인 요소가 본질을 압도한다는 문제도 제기돼 한 스웨덴 음악 평론가는 “마케팅, 스테이지 조명 그리고 사운드 기술자를 빼고 나면 그들도 단지 그저 그런 그룹”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록 음악 진영은 <롤링 스톤>지 아닌 <비즈니스 월드>지를 읽으며 여가를 보내는 상업성 지향의 그들에게 애초부터 무관심이었다.

그러나 많은 음악 관계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곡을 써서, 세대와 계층을 포괄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고 또한 외로이 스칸디나비아 출신 뮤지션들의 미국 상륙(Scandinavian Invasion)을 주도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사실 비(非) 영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영미 팝의 본고장을 정복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이 때문인지 예외 없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비슷한 계열의 버블검 그룹들 오스몬즈(Osmonds), 카펜터스(Carpenters)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시달렸다.

아바가 인기를 얻는 데는 여성 멤버인 안니 프리드와 아그네사의 리드미컬한 보컬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끄럽게 곡조를 타면서도 강렬했고, 또 듣기 좋은 하모니를 일궈냈다. 이와 함께 북유럽형의 늘씬한 신체와 미모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창출의 밑거름이었다. 국내에도 개봉된 78년 다큐멘터리 영화 <아바(Abba-The movie)>의 재미는 순전 두 여인의 '환상적인 엉덩이'로 초점이 맞춰질 지경이었다.

'오디오+비디오'의 AV시스템을 일찍이 구현한 아바의 네 구성원은 하나로 뭉치기 전부터 본국 스웨덴에서는 알아주는 스타들이기도 했다. 기타를 친 비욘(1945년생)은 포크밴드 웨스트 베이 싱어스(West Bay Singers)를 거쳐 후테내니 싱어스(Hootenanny Singers)의 멤버였고, 같은 1945년생인 베니는 '스웨덴의 비틀스'로 불린 그룹 헵 스타스(Hep Stars)의 베이스 주자로 활약했다. 1966년 우연히 어느 파티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간헐적으로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1969년 각각 아그네사와 안니 프리드를 만나게 되면서 공동 전선을 펴기에 이른다.

유일하게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2살 때 스웨덴으로 이주해 온 안니 프리드(1945년생)는 13살 때 이미 댄스 그룹의 리드 싱어로 나서 장래의 남편인 베니를 만나기 전까지 일본, 베네수엘라 등 국제 무대에 출전, 명성을 쌓았다. 탁월한 각선미의 아그네사(1950년생)는 스웨덴판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역을 맡아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I don't know how to love him)'을 불러 주목받은 인기 가수였다.

그녀와 비욘은 스타들의 결합으로 화제를 모으며 경찰이 하객을 통제하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1971년 7월 결혼식을 올렸고, 안니 프리드와 베니도 비슷한 시기에 약혼해 동거에 들어갔다. 배우자들로 짜여진 팀이라는 점은 독신주의가 팽배한 1970년대의 '감정 중독' 경향과 견줄 때 신선한 자극이었고 그룹 내부의 갈등 요소를 감소시켜 주는 순기능을 발휘했다.

눈에 띄는 불협화음없이 순탄하게 1970년대 중반을 질주하는 데 성공했지만 역시 그들도 베이비 붐 세대의 자유분방한 가치와 결별한 별종의 연예 스타는 못 되었다.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던 비욘과 아그네사가 1978년 12월 이혼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랜 동거 끝에 배니와 안니 프리드가 1978년 10월 웨딩마치를 올린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터진 일이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까, 베니 부부마저 2년 반만인 1981년 2월 갈라서고 말았다.

이혼과 그에 따른 팀 결속력 와해로 아바는 1981년 이후 급속히 인기 차트로부터 멀어져 갔고 1982년 안니 프리드(이 때부터 프리다), 1983년 아바 아그네사가 솔로 싱글을 내놓으면서부터 공식 해산, 뿔뿔이 흩어졌다. 베니와 비욘은 1984년 팀 라이스(Time Rice)와 연대해 뮤지컬 <체스(Chess)>레퍼토리를 써 그중 머레이 헤드(Muray Head)의 '방콕에서의 하룻밤(One night in bangkok)'을 히트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전성기에 아바는 미국에서 4장의 톱 10싱글과 5장의 톱 40앨범을 기록했다. 물론 두드러진 성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바의 멤버들은 미국을 유일한 '실패 지역'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럽만큼 미국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 팝 시장 진출의 교두보 확보'라는 매우 의미있는 역사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들로 인해 훗날 많은 북유럽 출신 가수들이 미국 상륙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노르웨이 그룹 아하(A-ha)가 '아바 이후 최대의 스칸디나비아 사절단'으로서 미국 정복에 성공했고, 스웨덴의 록시트(Roxette),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가 아바의 후광을 업고 1990년대 미 팝계를 석권, 스웨덴 열풍을 일으켰다. 특히 혼성 4인조라는 라인업까지 계승(?)한 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아바 신화의 재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그들을 능가할 만큼의 기세를 떨쳤다.

이제 아바의 이름은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섰지만 이러한 후배들의 잇단 등장은 여전히 아바가 '채권자'로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비단 스칸디나비아 국가 가수들 뿐 아니라 영미 댄스 음악 지향의 가수들도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아바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마돈나, 팻 숍 보이즈(Pet Shop Boys) 등 영국과 미국 댄스 가수들이 곧 아바에게 바치는 앨범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같은 사실 또한 아바가 팝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 그룹임을 암시하는 뚜렷한 사례일 것이다.

약력

1966년 베니 앤더슨과 브외른 울바에우스와 작곡 팀을 이룸
1971년 울바에우스와 팔초그 결혼
1972년 4인조 밴드 결성
1973년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에서 'Ring Ring'으로 3위 입상
1974년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에서 'Waterloo'로 그랑프리 입상. 앨범 [Waterloo] 발표 'Honey Honey' 히트.
1975년 'S.O.S.', 'Mama Mia', 'I Do I Do I Do I Do I Do'(앨범 [ABBA] 수록) 발표
1977년 'Knowing Me Knowing You', 'Dancing Queen', 'The Name of the Game'(앨범 [Arrival] 수록) 발표
영화 [Abba : The Movie] 제작.발표
1978년 'Take a Chance on Me', 'The Name of the Game', 'Thank You For The Music'(앨범 [Abba : The Album] 수록)
1979년 'Voulez-Vous', 'I Have a Dream', 'Chiquitita'(앨범 [Voulez-Vous] 수록) 발표
1978년 앤더슨과 링스타드 결혼 및 울바에우스와 팔초그 이혼
1980년 'The Winner Takes It All', 'Super Trouper'(앨범 [Super Trouper] 발표)
앤더슨과 링스타드 이혼
1981년 마지막 정규 앨범 [The Visitors] 발표
1982년 공식적 해체
1984년 뮤지컬 [Chess]에 링스타드와 울바에우스 참여
Atac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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